●신도림동 주상복합건물 화재 유일한 희생 박광진씨 ●도배일 하던 건물서 불… 의식 잃어가던 아내 살려놓고 ●중환자실 아내, 남편사망 모른채 “그이는요?” 17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주상복합빌딩 건설 현장에서 불이 났을 때 박광진(46)·전원심(43)씨 부부는 6층에서 도배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날도 평소처럼 새벽부터 도배를 시작한 부부는 오전 8시20분 갑자기 아래층으로부터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고 느낀 부부는 손을 잡고 4층으로 급히 내려갔다. 그 순간, 다른 인부들이 “어서 올라가” 소리치며 뛰어 올라오고 있었고, 그들 뒤로 시커먼 연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큰 불이 난 것이다. 부부는 황급히 뛰었지만, 연기는 더 빨리 다가와 부부를 덮쳤다. 6층으로 올라오자마자, 유독가스를 마신 부인 전씨가 쓰러졌다. 남편 박씨는 “정신 차려! 여기서 쓰러지면 죽어!”라고 외치며 부인의 가슴을 두들겼다. 부부는 다시 힘겹게 8층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전씨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남편은 8층 외벽 유리를 발로 찼다. 30층짜리 초대형 건물의 특수유리였지만 박씨의 발길질에 깨졌다. 사람 머리가 겨우 들어갈 만큼 구멍이 나자 박씨는 부인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일본 만화 캐릭터 ‘유희왕’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여느 아이와 달랐습니다. 생의 불꽃이 남보다 몇 곱절 빨리 사그라져 갔습니다. 병원에 갇혀 학교를 몹시 그리워했습니다. 넓은 바다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1년 9개월간 병마와 싸웠지만 소년의 의지만으론 역부족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그토록 가고 싶어 한 바다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한 줌의 유골이 돼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붉게 물든 눈시울 때문에 흐릿해진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다 되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다시 힘을 냅니다. 비록 짧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아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를 알기에, 또 세상이 얼마나 따뜻한 곳인지를 경험했기에….》○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백혈병 소년이 남기고 간 1년 9개월 삶과 죽음의 기록이정표. 13세. 서울 등촌초등학교 6학년. 정표가 남긴 이력의 전부다. 굳이 하나를 더 보태자면 작가 지망생. 그는 연필을 쥘 힘조차 없을 때면 엄마에게 일기를 불러 줄 정도로 일기에 집착했다. 정표의 어머니 김순규(41) 씨는 정표가 경건한 종교 의식을 치르듯 하루하루 일기를 써 내려갔다고 했다.일기는 소년에게 희망이었다. 살
●김장수 국방부장관●이역만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세계평화 수호의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불의의 테러공격으로 전사한 윤장호 병장을 가슴깊이 추모하며,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비탄에 잠겨있는 윤 병장의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분들에게도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국방부는 모든 장병들의 뜻과 정성을 모아 윤 병장의 거룩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고인을 기리고 명예를 선양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모든 장례절차를 진행함에 있어서 가족들의 뜻을 존중하고, 최단시간 내에 영현을 국내로 이송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또한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번 사고를 조속히 수습하고 다시는 이와 같은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반의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입니다.국방부는 이미 모든 해외파병부대에 최상의 경계태세를 유지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전우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대한민국 국군이 지향하는 조국수호와 세계평화의 숭고한 길을 꿋꿋이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들의 지혜와 의지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저는 국방장관으로서, 해외파병 전우들을 비롯하여 전후방 각지에서 국토방위에 헌신하고 있는 우리의 아들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부모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法長스님 유골 자연의 품으로● 역대 총무원장으로는 처음으로 병원에 시신을 기증, 생명나눔운동을 몸소 실천한 대한불교 조계종 전 총무원장 법장(法長)스님이 7일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우봉(佑峰)스님 등 법장스님의 상좌스님과 문도(제자)들은 이날 오전 법장스님의 유골을 산골(散骨) 처리하기 위해 유골이 보관돼 있는 경기도 고양시 동국대병원을 찾아 병원측으로부터 유골을 넘겨받았다. 우봉스님 등은 이날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20여분 동안 분향의식을 가진 뒤 스님의 출가 본사인 충남 예산 수덕사로 출발했다. 이날 행사에는 스님의 문도들과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소속 스님, 병원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해 법장스님이 남긴 숭고한 뜻을 기렸다. 유골을 넘겨받은 문도들은 수덕사에서 스님이 생전에 머물며 관심을 가졌던 인근 마을 사하촌과 경내를 돌아본 뒤 수덕사 뒷산인 덕송산 중턱에서 스님의 유골을 바람에 날려보낼 예정이다 문도들은 이어 대웅전에서 종사스님들과 함께 속세의 제사의식에 해당하는 다례(茶禮)의식을 갖고 이날 행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상좌스님 중 한 사람인 우봉스님은 이날 장례식은 문도들이 총무원과 병원측에 요구, 총무원 등의 적극적인 협조
●추모영화 시사회날 추락 노인 구한 일본인 ‘이수현’ ●고 이수현씨의 유훈이 일본 사회에 스며들면서 잔잔한 감동을 확산시키고 있다.지난달 26일 밤 11시45분쯤 일본 도쿄 우에노역. 나이 지긋한 노인(65)이 갑자기 비틀거리다 선로에 떨어졌다. 밤 늦게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야마모토 이사오(山本勳·57)가 선로로 뛰어들었다.뒤이어 회사원 마쓰이 히데유키(增井英之·29), 미즈노 도모다카(水野智隆·27)도 뛰어내렸다. 3명이 힘을 합해 노인을 승강장으로 끌어올리자 열차가 플랫폼으로 진입했다. 찰나의 순간이었고 노인은 무사했다. 26일은 이수현씨가 도쿄 신오쿠보 전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지 꼭 6년이 되는 날이다. 게다가 이날 오후에는 이씨의 추모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의 시사회가 열렸다.노인을 구한 야마모토는 자재상에서 일하면서 소방서, 적십자 등에서 평소 자원봉사 활동을 자주 해왔다. 이수현씨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2년전에는 신오쿠보역에 세워진 고인의 추모비도 둘러봤고 때마침 이틀전에는 이씨의 추모집 ‘너를 잊지 않을 거야’를 읽었다. 6년전부터 이씨 얘기를 듣고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던 터에 영화를 보기
국립 3·15민주묘지에서 처음으로 안장의식이 치러졌다.국립 3·15민주묘지관리소(소장 박원택)는 18일 오전 11시30분께 고(故) 김수년 3·15민주유공자(81·여.사진)의 영결식 및 안장의식을 거행했다. 이는 지난 2002년 9월 관리소 설치 이후 처음이다.영결식에는 유족들을 비롯해 김종배 3·15의거기념사업회장과 진두성 4·19민주혁명회 경남도지부장. 오무선 4·19혁명회희생자유족회 경남도지부장. 시민들이 참석하며 고인의 넋을 기리는 묵념. 약력소개. 추모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이어 주요 조문객들의 헌화와 분향으로 마무리됐다.영결식을 마친 이후 안장식은 유족 측의 주관으로 실시됐으며 고인의 시신은 국립묘지 제3묘역에 묻혔다.지난 16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한 고인은 1925년 창원군 구산면에서 태어나 60년 3월15일 마산지구당민주당 당원으로 3·15부정선거 규탄데모에 참가해 시위하다 경찰에 연행돼 전신에 심한 고문을 당했으며 2000년 1월 국가유공자로 등록됐다.한편 국립 3·15민주묘지에는 지난해 8월 천기홍 3·15의거공로자의 이장을 포함해 현재 27기가 묘역에 안장돼 있으며 민주묘지 안장은 국가유공자 유족들의 신청 이후 국가보훈처 안장심의위원회의
◆1944년 군속으로 일본 오키나와에 끌려갔다 이듬해 4월 미군 포로로 붙잡혔던 김상봉(85·부산 동래구 사직동) 씨는 광복 후인 1945년 12월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과 군속으로 강제 동원돼 사망한 한국인들의 유골이 안치된 도쿄의 절 유텐(祐天)사에는 그의 유골함이 보관돼 있다. 경기 포천시에 사는 김모(81) 씨도 유텐사에 유골함이 있다. 그는 유텐사의 기록 명부에 따르면 ‘1945년 5월 20일 사망’한 사람이다.◆최근 유텐사에 보관돼 있는 한국인 유골 1135위(位) 가운데 남한 출신인 704위의 명부 중 일부를 확인한 결과 최소 7위의 유골이 다른 사람의 것으로 드러났다. 유텐사에 유골이 있다고 기록된 7명 중 2명이 국내에 생존해 있고, 5명은 종전 뒤 한국으로 돌아와 사망했다. 유텐사 유골 중 엉터리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1970∼2005년 총 10회에 걸쳐 유텐사에서 한국으로 반환된 유골 1193위 가운데도 신원이 뒤바뀐 유골이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산 사람을 죽었다니”=유텐사 유골 명부에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浮島)호 침몰 때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는 박장서 씨는 1
●6ㆍ25 전사자 유해발굴 위한 전문부대 창설●전사자 유해발굴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JPAC(합동 전쟁포로·실종자 확인사령부)와 유사한 부대가 국방부 산하에 창설됐다.이와 함께 유해발굴 사업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전사자 유해발굴 지원법’(가칭)이 올해 안에 제정된다.국방부는 10일 “기존 육군본부 산하에 설치됐던 군 유해발굴 조직을 국방부로 편제하고 조직과 인력을 대폭 확대했다”고 밝혔다. 2000년 한국전쟁 50주년 사업으로 육군본부 내에 설치됐던 1개과와 1개 유해발굴반을 국방부 산하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으로 재창설하면서 4개과(계획과, 발굴과, 감식과, 지원과), 4개 발굴반 총 85명으로 조직과 인원을 대폭 보강했다.유해발굴감식단은 오는 3월부터 11월까지 6·25전쟁 당시 전투가 치열했던 경남 함안·진동 등 총 12개 지역에서 유해발굴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박신한(육군 대령) 유해발굴감식단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국방부 산하 유해발굴감식단 창설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의미”라며 “국가 무한책임 이행을 위한 정부의 가시적 의지를 국민에게 표현한 것으로 대국민 호국보훈 및 안보 공감대 확산과
●백범기념관 사업·이봉창 의사 재조명 발벗어● 김호연 빙그레 회장이 백범 김구 선생, 이봉창 의사 등 독립운동가 추모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김 회장은 김구 선생의 손녀사위라는 인연으로 독립운동가 추모사업에 적극 참여하게 됐다. 부인 김미 여사는 백범의 둘째 아들인 김신 전 교통부 장관의 외동딸이다. 또 김미 여사의 큰어머니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고 안미생 여사다.김 회장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이사로 활동하며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 건립에 큰 역할을 했다. 현재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백범 사상의 학술연구와 관련 출판물 발간도 지원하고 있다. 또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김구재단을 통해 매년 약 150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학술연구단체에 대한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특히 김 회장은 지난해 8월에는 서강대에서 ‘백범 김구의 리더십’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치학과 역사학의 시각으로 백범을 분석한 논문은 많지만 경영학 시각으로 접근한 논문으론 최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백범 리더십은 ‘자기희생’과 ‘성찰력’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이봉창 의사 기념사
○“…저기가 어디야,아름답구먼.나 이제 급히 감세○‘E.T.할아버지’ 채규철(69)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평생을 불꽃처럼 살아온 재야교육자 채규철씨가 13일 오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채씨는 지난 10일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한 뒤 수술을 앞두고 13일 오전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조선일보 2005년 6월 2일자 D1면 참조) 함경도 함흥에서 농촌운동을 하던 목사 아버지와 신여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채씨는 어렸을 때부터 농촌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 다짐했다. 6·25 때 혼자서 서울로 온 채씨는 길거리에서, 천막교회 한쪽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자며 공부해 서울시립농업대(서울시립대학교의 전신) 수의학과에 들어갔다. 졸업 후 덴마크에 유학을 다녀온 후 1961년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에서 교사직을 시작했다. 그러다 장기려 박사(전 부산 복음병원 원장. 평생 가난한 이와 함께하다 1995년 한푼 남긴 것 없이 별세. ‘바보 의사’로 불렸다)와 함께 일종의 의료보험인 ‘청십자의료조합’ 운동을 시작해 복지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신화상의 상처를 이기고 불꽃처럼 살다 간 교육자 채규철씨
●스페인서 온 유족 뿌듯하고 감사● 부인 로리타 안 여사 등 참석안익태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 참석을 위해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날아온 부인 로리타 안(91) 여사는 5일 여의도 KBS홀 로비에 전시된 마요르카 악보를 마주하자 한동안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온갖 감정이 가슴에 가득합니다. 이런 뜻깊은 음악회가 마련되고, 또 여기 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입니다.”검정색 정장에 진주 브로치를 단 로리타 안 여사는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신경을 썼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남편 생일에 대한 기억을 묻자 “그와 함께 한 모든 날,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고 답했다.이번 방문에는 셋째 딸 레오노르 안(53)과 외손자 데이비드 번스틴(32)이 동행했다. 레오노르 안은 “아버지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무대에서 내려오시면 천사처럼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회상했다. 아버지가 막내인 자신에게 자주 목마를 태워주시곤 했다고 말할 때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아버지는 음악을 통해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어요. 마요르카와 한국환상곡은 아버지의 혼이 담긴 대표적인 작품들입니다.” 외손자 번스틴은 “1
●쪽방서 혼자 살던 80대, 냉방서 외로운 죽음 ●7남매를 두고서도 쪽방에서 혼자 살아오던 80대 노인이 냉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3일밤 9시 30분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한 가정주택에 세들어 살던 김 모 노인(85)이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자는 부천에 사는 큰 아들이었다. 큰아들은 저녁 6시쯤 전화를 걸었는데도 통화가 되지 않아 찾아와보니 아버지가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발견 당시 2평 남짓한 차디찬 방에 이불만 덮고 누워있었다. 전기장판의 전원은 꺼져 있던 채였다. 집 주인은 숨진 김 씨가 평소에도 전기 요금을 아까워 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김 씨가 생활고 때문에 전기장판 사용을 자제해도다 영하 10도 안팎으로 떨어진 이날 저체온증으로 숨을 거둔 것으로 보고 있다. 김 씨는 큰아들과 함께 살아오다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로 5년 전부터 이곳에서 혼자 살아왔다.생계는 자녀들이 조금씩 보내오는 생활비로 근근이 유지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비보를 접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김 씨의 일곱 남매들은 얼음처럼 굳어버린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밤새 흐느꼈지만 모든 것을 잃은 뒤였다.
‘거지왕’ 김춘삼(78)씨가 별세했다. 김씨는 지난 8월부터 고령과 폐질환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26일 오전 5시40분 서울보훈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1928년 평남 덕천에서 태어난 김씨는 8세 때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가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짐승을 유혹하는 ‘미끼 노릇’을 강요 당하면서 거지 세계에 들어섰다. 20대 때 전국의 거지를 통솔하는 ‘거지왕’이 된 김씨는 한때 김두한, 이정재, 이화룡 등과 함께 ‘주먹 1세대’ 반열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이후 “도둑질이나 해서는 거지에게 내일이 없다”는 생각에 거지 구제 사업에 앞장섰다.1950년대에는 전국 10여 곳에 전쟁고아를 수용하는 ‘합심원’을 세웠고, ‘대한자활개척단’ 등을 운영해 거지들에게 자활 터전을 마련했다. 또 20여 차례에 걸쳐 거지합동결혼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공해추방국민운동중앙본부를 설립해 초대 총재를 맡으면서 이후 환경 운동에 관심을 보여왔다. 그의 일대기는 1999년 탤런트 차인표가 주연을 맡은 TV드라마 ‘왕초’로 재현되기도 했다.2001년부터 건강이 나빠진 김씨는지난 8월 갑작스런 호흡 곤란으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김씨는 이달 17일 상태가 악화돼 서울보훈병원
●이글은 본인이 부천호스피스를 시작하기전 근무했던 병원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통해 사랑을 나눴던 환우이야기다. 그 단체의 소식지에도 실렸던 글이지만 호스피스 사역의 이해를 돕기위해 싣게 되었다.●2005년 12월 3일, 오OO님은 많이 야윈 모습으로 병원 응급실에 왔다. 약간 불만스런 인상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경직된 모습이었다. 고통이 심해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2월 7일, 오OO님은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가정 호스피스로 전환하게 되었다. 가정에 계시는 동안 가족들과 더욱 가까워졌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깊어졌다. 편안한 상태에서 아버지에게 “마지막 가면서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좋겠다.”고 말하며 안구와 시신기증 의사를 밝히고 형제들과 부모님의 동의를 구하였다. 이 말을 하며 아버지께 “나 똑똑하지요?”하고 웃으셨다고 집사님은 전하셨다. 그러나 아들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 한동안 고민하다 그의 뜻대로 하기로 마음을 다졌다며 그래서 서약서를 제출하는 것이 늦어졌다고 하셨다.12월 20일, 복수가 너무 차서 배는 남산만해져 움직이거나 숨쉬기가 힘든 상태였다
민주주의 수호에 몸을 바친 희생자와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제26차 자유수호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31일 홍주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이종건 홍성군수를 비롯한 각급 기관단체장, 월남전고엽제후유증전우회, 해외참전전우회, 전몰군경 유족회, 전몰군경미망인회, 상이군경회, 재향군인회, 6·25참전회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한국자유총연맹 홍성군지부 주최로 열린 합동위령제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성경봉독, 기도, 독경 등의 종교의식과 추념사, 추도사, 조시낭독 및 조가, 헌화 분양 등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