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탄생했다. 독재자와 이에 항거해 민주화 운동을 벌인 할아버지를 가진 두 젊은이는 가문 간의 정치적 싸움을 종식했다. 지난 22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의 손자 마이클 페르디난드 마노톡(마이크)과 그의 독재에 항거했던 라울망글라푸스 전 외무장관의 손녀 카리나 아멜리아 망글라푸스(카라)가 필리핀 마닐라의 마카타 시에서 양가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25일에는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고향인 필리핀 북부 일로코스 노르테주의 한 성당에서 추수감사절 미사를 겸한 이들의 혼인 축하 행사가 열렸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과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의 장녀이자 마이크의 어머니인 이미 일로코스 노르테주 주지사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랑은 실로 두 가문의 과거 불화조차 눈을 멀게 한다. 두 사람의 결혼은 시간이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며 결혼식 사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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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정치인의 악연은 1965년 대통령 선거에서 시작됐다. 대선에서 승리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7년 뒤인 1972년 장기 집권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망글라푸스 전 장관은 계엄 선포 직후 미국으로 망명해 해외에서 필리핀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두 사람의 운명은 1986년 ‘민중의 힘(피플 파워) 혁명’으로 뒤바뀌었다. 21년간 필리핀을 통치하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망명했고, 귀국한 망글라푸스는 새로 들어선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다. 망글라푸스 전 장관은 1989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귀국을 반대했고, 그는 결국 하와이에서 72세를 일기로 숨졌다. 이들의 후손인 변호사 마이크와 음악가 카라는 2014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둘째 딸인 이레네의 아들 결혼식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웠다. 카라는 당시 신부 하객으로 참석했다. 지난해 마이크와 카라 사이에서 딸이 태어나면서 양가의 반대가 수그러진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언론들은 “필리핀 정계의 유명한 정적이었던 두 가문이 사돈을 맺었다”며 “사랑이 승리를 거뒀다”고 보도했다.
[사진 이미 일로코스 노르테주 주지사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