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과 '저것'으로 구분되는 무연고 사망자 시신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르다보면 종종 듣게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과 ‘저것’ 입니다. 운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때로는 의전업체의 직원들이 고인이 모셔진 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아마 가족들이 치르는 일반적인 장례였다면 제대로 된 존칭으로 지칭했을 것입니다. 코로나 탓에 자원봉사자 모집이 불가능한 요즘, 이 문제는 특히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운구를 위한 최소한의 인력이 갖춰지지 않다보니 의전업체 직원들은 현장에서 다른 운구 기사들을 섭외해야 합니다.
“불쌍한 사람이고 좋은 일이니까 도와줘야지”라며 함께 관을 드는 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들을 움직인 시혜와 동정이 고인을 빨리 ‘처리’해야 하는 짐짝으로 만들 때 깊은 아쉬움을 느낍니다.
서울시는 다른 지자체에 비해 좀 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공영장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직 보완해야할 점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근간이 되는 시스템은 갖춰진 셈입니다. 하지만 제도를 만든다고 해서 ‘존엄한 삶의 마무리’가 바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를 따라 시민들의 인식과 의식이 바뀌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깜빡’ 잊은 '처리'
보통 한국에서의 장례는 3일장으로 치러집니다. 마찬가지로 고인이 장례식장과 병원의 안치실에 머무는 기간은 길어봐야 사흘에서 나흘 정도 입니다. 하지만 무연고 사망자의 경우는 다릅니다. 무연고 사망자로 확정짓고 공문을 시행하기까지 행정에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한달 정도 입니다. 결국 고인들 또한 안치실에 그만큼 머무르게 됩니다. 세상과 이별하기까지 한달의 시간이 걸리는 것 입니다.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준비하다 보면 종종 안치기간이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도 마주하게 됩니다. 한두달 정도가 아니라 수개월에서 연단위로 안치실에 모셔져 있는 고인의 공문을 받기도 합니다. 안치기간이 길어지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르겠다며 시신위임 자체를 거부하다 미뤄질 때도 있고, 병원이 병원비 정산을 목적으로 시신을 볼모로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냥 사람들이 ‘깜빡’하기도 합니다.
2월에 장례를 치른 고인도 바로 그 ‘깜빡’한 사람입니다. 작년 11월에 병원에서 숨을 거둔 고인은 그대로 병원 장례식장의 안치실에 안치되었습니다. 보통의 절차대로라면 병원은 고인의 연고자파악 및 시신인계를 위해 구청에 공문을 보냈을 것 입니다.
그래야 구청이 가족이 나타나지 않은 고인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행정절차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병원과 장례식장은 공문을 보내지 않고 오랜 시간 고인을 안치실에 방치 했습니다.
고인이 안치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세들어 살던 집의 집주인 덕분이었습니다. 집주인은 매일 같이 술을 마시던 고인의 건강상태를 걱정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고인이 병원에 실려간 사실 또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퇴원 소식이 없자 고인을 찾아 병원에 직접 찾아간 것입니다. 병원에서 이야기한 고인의 근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고인이 이미 11월에 사망했으며,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채 그저 안치실에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집주인이 뒤늦게라도 동주민센터와 고인의 아내에게 부고를 알렸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쌓인 안치료는 수백만원에 달했고, 거기에 병원비까지 포함하면 장례를 시작하기 위해 정산해야할 돈이 천만원 단위로 불어났습니다. 아마 최소한의 장례를 치른다고 가정해도 그 금액에 몇백이 더 붙을테니 고인의 아내는 직접 장례 치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장례에 참여한 아내는 울분을 토하며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신을 포기하게 됐어요. 장례 마치고 병원에 쫓아가보려고 했어요. 동네 작은 병원도 아니고 큰 병원에서 일처리를 이렇게 하냐고요. 미리 알았으면 장례를 직접 했을거예요. 왜 사람을 무연고로 만드냐고요. 너무 기가 막혀요.”
아내의 이야기를 듣던 활동가도 커다란 부지를 가진 종합병원이 이렇게 고인을 방치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고인과 수년간 별거중이긴 했지만 조만간 다시 합칠 생각도 했다던 아내는 유골을 산골하며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고인을 안치실에 보관된 ‘그것’이 아니라 모셔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병원에서 이토록 오랜시간 ‘깜빡’하고 방치할 수 있었을 지 의문입니다. 상황판에 메모도 해가며 정성스레 모시는 다른 고인들과 다르다고 여겼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사람을 ‘처리’할 건가요?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의뢰 공문 속에는 수 많은 ‘처리’가 있습니다. 경찰 측에서 구청으로 보내는 ‘무연고 시신 처리 의뢰’부터 시작해서 가족들이 작성해야 하는 ‘시신 처리 위임서’, 장례식장이나 병원 등이 작성하는 ‘무연고 처리 요청’ 등 반복해서 등장하는 ‘처리’라는 단어가 고인의 존엄함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영장례’가 어떻게 치러지는지 모릅니다. 고인을 무연고 사망자로 확정짓고 그에 따른 모든 행정업무를 도맡아 하는 구청의 공무원도 마찬가지 입니다. 경찰, 병원, 장례식장, 구청 모두 공문 속 ‘처리’라는 단어로 고인을 만납니다. 그 단어가 무연고 사망자인 고인을 사람이 아닌 ‘처리’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처리’해야할 무언가, 혹은 ‘이것’, ‘저것’, ‘그것’… 무연고 사망자의 존엄함을 위해선 제도를 통한 시스템 마련 만큼 생각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切感)하는 요즘입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12조>는 ‘무연고 시신 등의 처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법률로 ‘처리’라고 못박은 만큼 행정에서 쓰이는 단어를 바꾸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과 품이 들테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을 가장 손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를 대하는 언어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처리’하지 않듯, 무연고 사망자 또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시혜나 동정이 아닌 우리와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았던 한 ‘사람’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존엄한 삶의 마무리’가 가능할 것 입니다. <이 글은 나눔과나눔의 그루잠 활동가가 작성했습니다>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