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갈릴리교회 원로목사이신 조영택 목사님이 8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지인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유투브 동영상을 통해 마지막 임종예배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빠~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것이 있으세요.” 아들에 이어 큰 따님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침상에 누워계신 아버지가 말씀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은 나를 지으시고 나를 만드시고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세상 가운데서 지켜 주시기를 꼭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자식들에게 건네는 말 일 텐데.... 그러나 끝까지 존칭을 쓰고 계셨다. 그 분의 품격이었다. 침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막내딸과 큰 딸이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에는 아내와 둘째 딸 그리고 손주들이 둘러앉아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함께하지 못한 가족들은 줌(zoom)으로 참여했다. 아들은 기타를 들고 예배를 인도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마치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부르던 예수님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고백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십니다. 끝까지 계십니다. 내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신앙 고백할 때 자녀들은 한결같이 ‘아멘’으로 응답했다. 이어진 말씀은 45년 목회의 결정판이었다.
“내가 대장이 아닙니다. 내가 대장이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대장입니다. 대장 노릇 하지 맙시다. 하나님 대신 대장 노릇 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대장이십니다.”
피를 토하듯 쏟아내는 말씀에 나도 모르게 아멘이 흘러 나왔다. 나도 가족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 ‘아멘’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장례식장에서 완장을 차고 설치던 목사들과 내가 오버랩되었다. 내가 한 없이 슬펐다. 목사님의 말씀이 내 ‘골수를 쪼개고’(히 4:12) 있었다.
임종을 앞둔 가족들은 40여분 내내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었다. 목사님이 그렇게 원하셨단다. 선곡도 하셨다. 알고 보니 음악가족이었다. 아들은 언어학을 전공했지만 CCM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한다. 두 딸 은영과 은성은 음악을, 막내 은아는 문학과 선교학을 전공했다. 아들은 ‘그의 생각’을 둘째 딸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었다.
아들 조 준모교수(한동대학)와 통화를 했다.
집안의 가훈이 ‘창조하는 자유인’이었다고. 지인이 전해준 말에 의하면 평소 목사님은 자신을 ‘영~ 택도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단다. 84년 생애가 끝없는 겸손이었다. 가훈대로 사셨던 목사님은 집안에서도 똑같이 재미있는 분이셨다.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처음 죽어봐서 어떻게 할 줄 모르겠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셨던 목사님은 죽음 준비만큼은 아주 철두철미하셨다고 한다. 아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봉투를 내 놓으시며 주위의 작은 교회와 도움이 필요한 몇 분에게 건네주라고 하셨다. 더구나 ‘나 없이 내일이 시작될’ 어머니를 위해서도 은행 정리를 완벽하게 해 두셨단다. 장지(葬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도 20년 전에 준비해 놓으신 것이었다.
나는 이 가족들의 영상을 서 너 차례 보고 또 보았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임종(臨終)이 또 있을까? 목사님은 죽음 앞에서 당당했다. 림프종과 싸워 이겼다. 물러간 줄 알았던 녀석이 또 다시 찾아왔다. 재발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때를 아셨던 것일까? 목사님은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아들은 말했다.
“자칫했으면 독한 약과 싸우느라 병상에서 내내 혼수상태에 머무실 뻔 했죠. 정말 감사하게도 집 안에서 통증완화 치료를 선택했기에 가족들과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덕분에 아버님을 씻겨드리기도 했고요. 정신이 또렷할 때는 가족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행복했어요.”
마지막 순간,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인사했다.
“하나님 주 안에서 평안히 영원히~ 잘 살아요. 같이 살아요.”
자녀들이 화답했다.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아빠와 할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방 안 가득 메아리쳤다. 또 다시 찬양이 이어졌다.
“안개 같은 나의 인생 광야 길을 걸어올 때 주의 신신하신 손길, 나를 인도하시었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품에 더 가까이”
목사님은 찬송할 때 가만 있지를 못했다. 가족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손놀림은 유연했고 우아했다. 박수치며 흥을 돋구셨다.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아주고 큰 딸의 손을 오랫동안 놓지 못했다. 손주들을 찾고 이름을 불렀다. 족장 야곱처럼 두 손 들어 가족들을 축복했다. 자신들의 이름을 찾고 부르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손주들은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품에 더 가까이 가기를 희망했던 그는 다음날 오전 10시 30분, ‘창조하는 자유인’으로 주님의 품에 안겼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임종장면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의 삶을 살아낸 천국시민의 기품이었다.
나는 기도한다. 나도 조목사님의 죽음을 죽게 해 달라고.
(*영상은 홀연히 세상 떠나고 난 다음 아쉬워할 이들을 위한 배려에서 남겼다고 한다. 그것도 조목사님의 뜻이었다. 장례식은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