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변화시킨 무연고 장례
1년 중 가장 짧은 달인 2월엔 막바지에 이른 겨울을 보내고, 새로운 계절인 봄에 대한 설렘과 희망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의 뇌리엔 졸업식과 꽃다발, 발렌타인데이 등의 이미지가 흔히 떠오르고, 눈이 녹은 후 움트는 가지가 연상되기도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2020년 2월은 참으로 안타깝고 힘든 달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신종 코로나, 확진자, 격리’ 등의 검색어는 하루도 빠짐없이 포털 사이트를 장악했고, ‘마스크’ 파동과 함께 ‘사회적 격리’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우울함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회가 불안했던 2월 한 달 동안 무연고 사망자 장례엔 여러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선 나눔과나눔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예방차원에서 무연고 장례에 자원봉사자 모집을 중단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서울시립승화원은 방역시스템을 강화해 모든 출입문은 통제하고, 접수실 바로 옆 출입문에는 열 감지 카메라까지 동원했습니다. 국가의 중요시설인 만큼 만일의 상황에 만반의 대비를 철저히 하는 모습입니다.
가장 따뜻한 겨울을 지내며 유난히 눈과 비가 잦았던 2월 한 달 동안 안타깝게도 하루도 빠짐없이 무연고 장례가 있었습니다. 이는 나눔과나눔이 2015년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지원한 이래 처음 있는 현상으로,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의전업체가 새로 바뀌어 장례업무진행방식이 이전 업체와 달라진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무엇보다도 무연고 사망자의 발생수가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개인정보 보호가 사람을 죽였어요.”
지난 2월 말 장례식에 참석한 한 여성이 작정한 듯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일순간 주위의 분위기가 심각해졌고, 여성분은 아랑곳 않고 마음에 맺힌 이야기를 꺼내놓았습니다.
1월 말 뇌출혈로 사망한 무연고 사망자 ㄴ님은 1949년생으로 복잡한 가족사로 인해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달라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장례에 참석한 여성분의 어머니와는 4촌 자매간이었습니다. ㄴ님은 임대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유일하게 연락이 되는 5촌 조카에게 의지해 살았습니다.
“살아 계실 때 고추장, 된장이 떨어지면 보내달라고 저를 귀찮게 했어요. 다른 혈육이 없으니 저한테 보호자가 되어 달라고 하신 거죠.”
그러던 지난 1월 말 어느 아침에 ㄴ님으로부터 “머리가 아프고 구역질이 심하다.”며 자신을 병원에 입원 좀 시켜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걱정이 된 조카는 일단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소요되니 근처 병원에 가 먼저 가시도록 당부하고, 서둘러 병원에 도착해보니 ㄴ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급하게 임대아파트로 갔지만 정확한 주소를 몰라 관리사무소로 가서 집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고, 급박한 상황을 설명하며 사정이야기를 한 끝에 관리사무소로부터 “ㄴ님의 현관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조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병원으로 이동을 하다 느낌이 안 좋아 경찰에 신고를 했고, 출동한 경찰이 문을 뜯고 들어가 방안에 쓰러져 있는 ㄴ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지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ㄴ님은 병원으로 갈 수 있었지만 골든타임은 이미 놓친 상황이었고, 끝내 일주일 만에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5촌 조카는 법률상의 연고자가 아니라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 배다른 형제자매가 시신인수를 거부하고서야 ㄴ님은 무연고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외롭게, 불쌍하게 살다 돌아가셨어요. 장례도 못 치르나 했는데, 그나마 공영장례로 보내드릴 수 있어 감사하네요.” 제 때 치료도 못하고 이모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조카는 장례 내내 마음을 억누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 글은 나눔과나눔 활동을 지지하는 부용구 활동가가 작성한 글입니다]
#무연고장례 #서울시립승화원 #개인정보보호 #나눔과나눔 #김동원장례문화연구소 #웰다잉생전계약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