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에 발전한 한류가 21세기에 전 세계에서 열광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한류 스타들이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 중국을 석권한 원조 한류스타가 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김염. 본명은 김덕린입니다.
1927년 18세 소년이었던 그는 중국 상해에서 영화사 허드렛일과 엑스트라, 단역을 거치면서
1932년 개봉한 영화 '야초한화(野草閑花)'로 스타가 되었습니다.
'친구로 사귀고 싶은 남자 배우 1위'
'가장 사랑받는 남자 배우 1위'
'가장 잘생긴 남자 배우 1위' 등
그는 온갖 찬사를 받으며 중국 국민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독립투사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중국에서 어렵게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후 영화사에 취직한 뒤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시작했는데 일본 제국주의를 홍보하는 영화는 출연을 거부하고 제국주의에 맞서고 저항하는 영화는 적극적으로 출연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독립운동가 가문임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안창호 선생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아버지 김필순을 비롯하여 고모 김순애 역시 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했고, 고모부는 '파리 강화 회의(Peace Conference at Paris)'에 한국인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이었습니다.
일제는 얼마나 김염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을까요?
제국주의를 위한 영화에 출연하라는 협박에도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다'라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김염은 영화를 통한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보다는 영화라는 문화 상품을 통해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아시아의 청년들을 대표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중국인이 사랑했던 영화배우.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거부한 의식 있는 공인.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원조 한류스타의 모습입니다. [출처 : 따뜻한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