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물들은 1971년 12월에 대곡리 마을 주민 구재천 씨가 자기집의 빗물 배수로 공사를 하다 돌무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치우는 과정에서 수습한 것이다. 수습된 유물의 가치를 모른 구씨는 마침 마을을 찾아온 엿장수에게 넘겼고, 이 엿장수는 이를 다시 전남도청에 넘김으로써 놀라운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공개됐다. 당시 전남도청 신고를 받은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나중에 이 기관의 수장을 역임하게 되는 조유전 학예연구사(현 토지박물관장)를 현장에 급파해 긴급 수습조사를 벌였다.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이 36년만에 이 유적을 다시 발굴하고 20일 그 현장을 공개했다. 지난 13일부터 시작된 이번 조사는 무덤구조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21일 끝난다. 재발굴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재조사를 통해 대곡리 유적은 그 구조를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조현종 관장은 밝혔다. 유적 현장은 버려진 창고와 함께 시멘트 도로가 덮고있었으며 그 주변은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조사 결과 이 폐창고는 암반층을 파내고 축조되는 바람에 유적 지형을 심하게 훼손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이번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대곡리 고분은 그 축조 방법을 엿볼 수 있는 면모를 비교적 많이 노출했다. 매장시설은 풍화한 암반층을 파내고 마련했다. 묘광(墓壙)은 상하 2단으로 파내는 방식으로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상층 1단은 동-서 330㎝, 남-북 280㎝의 평면 방형에 가까웠으며, 깊이는 동쪽 기준 85㎝ 가량이었다.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좁은 묘광이 발견됐다. 규모는 동-서 230㎝, 남-북 105㎝, 깊이 65㎝인 평면 장방형이었다. 묘광 바닥면에서는 목관 바닥면 흔적이 관찰됐다. 그 범위는 동-서 115㎝, 남-북 40㎝ 안팎이었으며 서쪽 끝부분에서도 일부 목관 흔적이 드러났다. 목관을 놓았던 외곽 중 북쪽에서는 25㎝ 내외의 깬돌을 1열로 쌓았음이 밝혀졌다. 이들 채움돌과 목관 사이에는 두께 10㎝ 안팎의 회백색 점토가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대곡리 고분이 축조된 시기를 기원전 4-3세기 무렵으로 간주한다. 청동기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초기 철기시대가 개막하는 무렵에 형성된 유적으로 보는 것이다. 조현종 관장은 "새로운 유적을 조사하는 것만큼이나 기존에 조사한 유적을 다시 조사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