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살문, 불이문, 신도비각을 차례로 거치면서 의절사(義節祠)에 이르니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977년 김문기가 추봉(追封)된 까닭이다. 천추에 길이 남을 의절과 그 고통스러웠을 죽음에 두 번의 경배 예의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듯싶다. 숙연해질 따름이다. 왼쪽으로 오르니 하위지 성삼문 유성원의 묘가 있고, 10여보 우측에 이개 유응부 박팽년 김문기 묘가 한강수를 등에 지고 풍진 세월을 누워 있다. |
윤갑원 교수를 따라 만두 위에 오르니 오른쪽으로 한강대교가, 왼쪽으로 한강철교가 내려다보인다. 강 한가운데서 한강대교를 받치고 있는 노들섬은 망자들의 설한풍을 막아 주는 병풍인 듯싶으며 때로는 베개로도 생각하고 싶다. 모두가 애달픈 죽음이 안타까워서다. 오늘따라 ‘사람이 대를 잇고 산다는 것’에 대해 유별나게 강조한다. 왕릉같이 우람하게 잘 써 놓은 묘도 몇 년만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지고 평토화되어 간다. 하기야 시골집도 사람이 살면 풀이 못 자라는데, 빈집으로 방치하면 초목이 무성하고 담이 무너져 폐허가 되는 걸 수없이 보아온 터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다 금강산 위에서 한북정맥으로 갈라지는 게 서울을 형성하는 용맥으로, 한강을 만나면서 멈춰 선다. 이른바 산진수회다. 반면 한수 이남의 강남은 태백산으로 내리닫는 백두대간이 속리산에 와 우뚝선 후 한남정맥으로 올라오는 맥이다. 같은 서울의 산이라도 남산은 한북정맥이요, 관악산은 한남정맥에 속한다. 사육신 묘는 한남정맥이 한강을 따라 내려오다 결인된 곳이다 |
일곱 명의 문하생 모두가 나경을 꺼내 든다. 일행 중 몇몇이 사육신 묘가 여기인 줄 몰랐다며 뒤늦게 찾아온 걸 미안해 한다. 서울 도심에 있으면서도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자괴심도 든다. ▲하위지-묘좌유향 ▲성삼문-갑좌경향 ▲유성원-갑좌경향 ▲이개-갑좌경향 ▲유응부-갑좌경향 ▲박팽년-인좌신향 ▲김문기-축좌미향. 한 묘역에 모셔도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 좌와 향이다. 건너의 안산을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물형(物形)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형(蛇形)을 앞에서 보면 달려드는 형국이요, 뒤에서 본다면 달아나는 국세(局勢)가 되고 만다. 흘러가는 물을 보지 말고 흘러오는 물을 바라 봐야 기를 받는다고 했다. 군자동침(君子東枕)이라 하여 잠을 잘 때 머리를 동쪽에 두었고 강의 상류 쪽이나 집 뒤의 동산을 향해 베개를 베고 잤다. 죽기를 작정하면 두려울 게 없는 법이다.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허벅지를 찌르고 팔을 자르는 모진 악형에도 표정 하나 변함없던 성삼문. 되레 국문하던 무사들이 기겁했다던가. 사육신의 참혹상이야 실록에 기록된 바 그대로지만 그 화가 당사자에 그치지 않았다는 데 역사는 더욱 비참해지고 만다. 성삼문은 아버지(성승), 동생 셋(삼빙·삼고·삼성)과 아들 넷(맹첨·맹년·맹종·갓난아기)까지 몰살당했고, 다른 사육신들도 거의 같은 꼴로 멸족당했다. 그들은 삼족이 멸하는 화를 뻔히 알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다만 박팽년만이 유복자가 살아남아 후손이 봉사(奉祀)하고 있을 뿐이다. |
사실 그렇다. 연산군 묘와 광해군 묘를 가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반정(反正)이 일어나 천하가 뒤집어졌는데 길지를 찾겠다고 나서는 풍수는 죽으려고 환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숙종 17년(1691)에 와서야 신원되고 치제(致祭)케 하며 벼슬을 증직받았지만 사람 죽여 씨조차 말려 놓은 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도 역사의 서슬은 시퍼렇게 살아 있다. 사육신을 포함한 100여명의 충의순절은 죽음을 두려워 않는 선비정신, 임진왜란의 의병, 최익현·안중근·김구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으로 길게 맥이 닿는다. 학자들은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죽음과 4·19의거, 6월민주화운동도 예사로 보지 않고 있다. ‘무덤 릉(陵)’자를 표기할 때, ‘능’과 ‘릉’의 구분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 두자. 단어의 첫 음절에 올 때는 두음법칙에 의해 ‘능원’ ‘능묘’처럼 첫소리를 ‘ㄴ’으로 쓴다. 그러나 첫 음절이 아니면 ‘ㄹ’을 그대로 살려 ‘릉’으로 표기해야 맞다. 예컨대 ‘서오릉’ ‘정릉’ ‘태릉’ ‘서삼릉’으로 써야 한다. 금곡에 있는 고종황제의 능은 ‘홍릉’, 순종황제 능은 ‘유릉’, 여주 세종대왕 능은 ‘영릉’, 구리시의 아홉 왕릉은 ‘동구릉’으로 표기해야 옳다. 우리 어법이 그렇다고 하니 전국 각지의 능 제향 시 이를 따라야 할 것 같다. |
사육신 묘의 좌향을 찾게 해주는 나경(방위측정기구)은 도대체 무엇인가. ‘포라만상(包羅萬象) 경륜천지(經綸天地)’에서 ‘나’자와 ‘경’자만을 따온 것인데, 허리에 차고 다닌다 하여 패철(佩鐵) 또는 뜬쇠로도 불렸다. 부채 끝에 달면 선추(扇錘)였고, 둥근 원반 모양이어서 윤도(輪圖)로도 지칭한다. 현재 전통 윤도 제작은 전북 고창군 김종대(74)씨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돼 맥을 잇고 있다. 중국 한대(漢代)에는 나경이 점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세기쯤으로 추정되는 낙랑고분에서 식점천지반(式占天地盤)이라는 나경이 출토되어 그 유래를 찾고 있다. 나경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풍수사상이 생활과 밀접해지고 일반화되면서부터다. 선조대왕 실록에 윤도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나경은 태극에 근거한다. 중국 문왕(文王)의 후천팔괘를 인용하여 만든 것으로, 우주 원리인 음양오행의 천지도수가 함축되어 있다. 정남북을 가리키는 자기력이 있어 바닥에 철분이 있는 곳에서는 오작동할 수도 있다. 몸 안의 시계나 열쇠꾸러미 등은 멀리하는 것이 측정의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 가격도 천차만별이어서 1만원에서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 |
1층은 황천살(팔요수)로, 표시된 방향에 물이 보이거나 산이 함몰되어 있으면 아주 고약한 흉살로 본다. 이 밖에 ▲2층은 팔요풍(황천풍살)으로, 표시된 방향이 허(虛)하거나 득수(得水)가 되면 바람의 침입으로 보아 혈처 안이 냉해지는 방위다. 이때 황천살과 팔요풍의 방향은 나경 4층을 기준으로 한다 ▲3층은 삼합오행을 보며 좌, 득수, 파구(破口·물 나가는 방향)가 정삼각형을 이루면 대길로 본다. 비석을 세울 때 사용한다 ▲4층 지반정침(地盤正針)은 나경의 기본 방향이며 24방위가 표시돼 있다 ▲5층 천산칠십이룡(穿山七十二龍)은 주산에서 만두까지 오는 용맥 방향을 결정한다 ▲6층 인반중침(人盤中針)은 좌와 사(砂)의 관계를 본다 ▲7층 투지육십룡(透地六十龍)은 땅속을 통해 들어가는 맥을 본다 ▲8층 천반봉침(天盤縫針)은 좌와 관계되는 득수·파구는 물론 호수 등 머무르는 물의 길흉 관계를 본다 ▲9층 분금(分金)은 마지막 입관 후 좌를 건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용맥과 관의 방향을 맞춰 보는 선이다. 나경은 풍수가 평생을 공부해도 모자라는 신기(神器)다. 9370평의 묘역을 살피다 보니 만두 아래에 폐묘가 하나 눈에 띈다. 문인석이 돌아앉았다. 사료적 근거는 없지만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 묘로 전해 온다. 진위를 떠나 이왕에 묘역을 단장하면서 이래도 되는가 싶다. 알고 보면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묘도 추가로 봉안한 가묘이다. 살아남았으면 나라 위해 더 큰 일을 했을 아까운 인재들…. 사육신 도륙 이후 조선왕조는 세조대왕의 왕자와 그 후손이 대를 이어 통치했고 모의를 밀고했던 변절자들은 영화를 누리며 잘살았다. 살아서의 일신영달과 죽어서의 역사적 평가가 교차하며 시야를 뿌옇게 한다. 사육신 묘역에는 일곱 분이 모셔져 있어도 ‘사칠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세계일보]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