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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무덤 5000기, 은평뉴타운에 집중, 왜?

 
- 은평뉴타운내 왕족·상민의 무덤 200여기가 남아있는‘이말산’전경./서울역사박물관 제공
▶"禁葬구역" 바로 앞 은평 조선시대 "망자의 고향" ▶왕족부터 상궁·역관까지 다양한 계층이 묻혀
▶북한산 자락 창릉천 부근 은평구 진관동·구파발동에 자리한 은평뉴타운은 본격 개발에 앞선 지난 2005년부터 3년 동안 문화재 발굴이 이뤄졌다. 중앙문화재연구원, 한강문화재연구원, 서울대 고병리(古病理)연구실팀이 참여했는데, 조사 결과는 놀라웠다. 349만5248㎡(105만7300평)의 부지에서 나온 조선시대 묘터만 5000기. 수습된 유골은 41기로, 법의학 연구를 통해 망자(亡者)들이 평소 앓던 질병까지 드러났다. 고고학 영화의 고전 "인디아나 존스"의 배경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 은평뉴타운 지역에서 출토된 인골(人骨).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묏자리 잡기 좋았던 성곽밖 10리
지금의 은평뉴타운 일대는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였다. 한성부와 경기도 고양·양주가 만나는 접경에 있는 데다, 한양과 의주를 잇는 서북대로(西北大路)가 지나갔다. 조선의 지리학자 김정호가 그린 채색지도 "동여도"(東輿圖)를 보면 지금의 진관동 북쪽 창릉천 부근에 "금암참"(黔巖站)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중앙과 지방 사이 소식을 전하던 파발(擺撥)이 쉬어가는 "참"(站)이 있었던 것이다. 금암참은 서북대로의 실질적 출발점인 동시에, 개경 등 서북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서는 관문이었다. 능행(陵幸)에 나선 임금도 자주 오갔다.

이렇게 사람의 발길이 잦았는데 어떻게 묘자리를 그렇게 많이 썼을까? 은평뉴타운 중간에 있는 "이말산" 유적을 보면 왕족부터 내시·상궁·역관까지 다양한 계층이 이곳에 묏자리를 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 영조의 외조부 최효원(崔孝元), 숙종이 이모처럼 여겼다는 임상궁(林尙宮), 명종대의 상선(尙膳·종2품 내시) 노윤천(盧允千)도 죽어서는 이말산에 묻혔다.


 
- 은평뉴타운 지역에서 출토된 동경과 칠성방울.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이렇게 무덤이 많은 이유를 알려면 조선의 법률을 뒤져봐야 한다. 조선 왕조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성저십리 금장·금송(城底十里 禁葬·禁松)"이란 규정을 두었다. 성저십리는 서울성곽에서 십리까지, 즉 한성부의 행정력이 미치는 도성 지역을 뜻한다. 성저십리 안에는 멋대로 무덤을 쓰거나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박상빈 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은 "요즘도 서울 주변에 "개발제한구역"을 두듯이 조선시대에도 신성한 도성 안과 인근을 함부로 손대지 못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영조 때 편찬된 법전 "속대전"(續大典)과 이런 금지구역을 표시한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를 보면, 성저십리는 동쪽으로 우이천·중랑천까지, 남쪽으로 한강·노량진까지, 서쪽으로 양화진·창릉천까지, 북쪽으로 북한산·연신내까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성에서 사람이 죽어 이 지역을 피해 묻으려고 할 경우, 도성을 빠져나가자마자 나타나는 지금의 은평뉴타운 일대가 최적의 묘지 장소인 셈이다. 도성과 이곳 사이에 무악재(현저동~홍제동 사이 고개)와 박석고개(불광동~구파발 사이 고개)가 있어 경계가 분명한 점도 민초들이 마음 편히 묘를 쓸 수 있도록 해줬을 것이다.

 
- 은평뉴타운에서 발굴된‘김자근동’의 척추 뼈.‘ (노인성) 척추후만증’을 앓은 것으로 추정된다./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사람들, 어떤 병을 앓았나?
작년 8월 은평뉴타운의 남쪽 중앙부인 2지구에서 남·녀 유골이 든 회곽묘가 발견됐다. 회곽 덮개에 "행동지중추부사 김자근동"(行同知中樞府事 金者斤同)이라 적혀 있어 망자가 "동지중추부사"란 명예직을 얻은 김자근동과 그 아내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자근동이란 특이한 이름은 "작은둥이"란 한글 이름을 한자로 옮기며 생겼을 것으로 추정됐다.

여기서 멈출 뻔했던 연구는 서울대 고병리연구실팀의 분석 결과가 나오며 진척됐다. 팀을 이끄는 신동훈 교수가 자근동의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 유골의 휜 허리 뼈를 보고 등이 구부러지는 "척추후만증"이란 결론을 내렸다.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할 등골뼈의 일부가 맞붙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노령으로 인해 그런 증세가 생겼으리라 추정됐다. 자근동의 아내는 유골 상태로 미뤄 골다공증과 퇴행성관절염을 앓았다고 여겨졌다.

고병리학자들이 합류해 얻어낸 결과는 또 있다. 은평뉴타운에서 발굴된 41기의 인골 중 상당수에서 뼈의 염증, 골절, 척추이분증(척추 뼈의 기형) 같은 질병을 앓은 흔적이 있었다. 어느 두개골엔 툭 튀어나온 혹 같은 종양이 붙어 있기도 했다. 박준범 한강문화재연구원 부원장은 "국내 발굴 현장에서 보기 드물게 법의학 전문가들이 참여해,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떤 병을 앓았고 몇 살쯤 죽었는지 추정해 보는 게 가능했다"고 말했다.

 
- 현장 발굴 조사 당시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무덤 밖으로 걸어나온 조선사람들
은평뉴타운에서 나온 유적·유물은 이외에도 많다. 한 무덤에선 망자를 하늘로 이끄는 굿에 쓰이던 대신칼과 방울이 나왔다. 바리공주가 썼던 무구(巫具)라는 대신칼은 무덤 주인공이 무당임을 암시한다. 또 다른 무덤에선 달걀이 담긴 분청사기 항아리가 나왔다. 죽은 자가 먹길 바라며 넣은 것으로, 달걀은 신라 천마총에서도 발굴됐었다.

서울에서 보기 드문 신라시대 유적도 있다. 은평뉴타운 동·서 양쪽 끝에 해당하는 3지구에선 통일신라시대 가마터 11곳이 발굴된 것이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 사이에선 "삼각산 청담사 삼보초"(三角山 靑潭寺 三寶草)라 쓰인 기와도 나왔다. 신라 중기 불교계를 이끈 화엄종의 10대 절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한주 부아악(漢州 負兒岳·서울 북한산)에 있었다는 청담사를 언급한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런 유물을 모아 4일부터 다음 달 13일까지 "은평 발굴, 그 특별한 이야기"란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는 은평의 역사를 담은 "옛 은평을 향하다", 이말산 비석과 인골을 분석한 "옛 서울사람을 만나다", 조선시대 상장례를 알려주는 "예법과 풍습을 돌아보다", 발굴 유물·모형을 전시한 "발굴현장을 찾다", 절터·가마터를 보여주는 "그 밖의 유적들" 등 다섯마당으로 구성됐다. 무덤 밖으로 걸어나온 조선시대 사람들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다.[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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