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에서 무덤방(玄室)으로 통하는 무덤길에서 동서쪽으로 나란히 놓인 채 발견된 두 묘지(墓誌에는 모두 중앙에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나아가 무령왕 묘지(墓誌) 뒷면에는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명칭만 제외한 "십이간지(十二干支) 방위표"가 그려져 있었다. 중국 투르판 지역 고문서를 주로 연구하는 일본 히로시마대학 시라스 죠신(白須淨眞) 교수가 무령왕릉 발굴 이후 30여 년 동안 어느 누구도 풀지 못한 무령왕릉을 둘러싼 최대의 미스터리인 묘지(墓誌)의 구멍과 십이간지 방위표에 얽힌 비밀을 마침내 풀어냈다. 시라스 교수는 미술사학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권영필 교수의 정년퇴임 논총에 투고한 논문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ㆍ왕비 합장묘의 묘권(墓券.매지권)ㆍ묘지석(墓誌石)에 관한 한 제언"에서 묘지(석)의 구멍은 무령왕이 지하신들에게 묘지(墓地)를 구입하고 지불한 돈꾸러미를 끼웠던 흔적이라고 밝혔다.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그의 묘지(墓誌)와 매지권에 의하면 523년 62세로 사망한 무령왕은 525년에 지금의 송산리 고분군에 묻혔으며, 토왕(土王)과 토백(土伯)을 비롯한 각종 지하세계 신들에게 "돈 1만문"(錢一萬文)을 주고 신지(神地), 즉 서쪽 땅을 매입했다. 시라스 교수에 의하면, 십이간지 방위표에서 유독 서쪽 방위만 표시하지 않은 것은 매지권에서 밝힌대로 무령왕이 바로 서쪽 땅을 사서 매입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표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무령왕 묘지(墓誌)는 무덤길 오른쪽(동쪽), 그 왕비 묘지(墓誌)는 왼쪽(서쪽)에 각각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오수전(五銖錢)이라는 중국 고대 동전 90여 개가 꾸러미 상태로 발견됐다. 왕과 왕비 묘지(墓誌)는 무덤방 바깥이 아니라 무덤방 안쪽에서 텍스트를 읽을 수 있도록 놓아 두었다. |
그는 "무령왕만 묻었을 때는 "십이간지 방위표"를 뒷면에 새긴 무령왕 묘지(墓誌)판석과 매지권을 새긴 다른 판석(나중에 그 뒷면에 왕비의 묘지(墓誌)를 새김)은 1971년 발견 상태와 같이 왼쪽-오른쪽에 나란히 놓은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포개 놓았었다"면서 "묘지(墓誌)나 매지권 등의 각종 문서 내용이나 형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묘지(墓誌)가 위, 매지권이 아래에 놓였음이 분명하며, 두 판석 중앙에 난 구멍은 무령왕릉 발견 당시에 발견된 오수전 꾸러미를 꿴 끈을 끼운 공간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래픽 참조) 이런 주장을 접한 고고학자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아무도 풀 수 없던 난제를 시라스 교수가 단번에 풀었다"고 평가했으며, 돈황학 전공인 민병훈 국립청주박물관장은 "시라스 교수가 기존 한ㆍ일 고대사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투르판지역 고문헌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쌓은 학자이기에 파천황(破天荒)을 방불케 하는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연합뉴스]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