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묘, 석실묘, 주자가례

2009.04.18 12:13:25

 
- 두번째 조선시대 벽화묘가 강원도 원주시 동화리의 충정공(忠正公) 노회신(盧懷愼.1415-1456) 묘에서 발견됐다. 석실 네 벽면(남쪽 2호분)에는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사신도(四神圖)를 그려넣었다. 2009.4.15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
▶16세기 이후 회격묘 일색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연웅)가 15일 두번째 조선시대 벽화묘 발견 소식을 전했다. 교하노씨(交河盧氏) 문중이 강원도 원주시 동화리의 충정공(忠正公) 노회신(盧懷愼.1415-1456) 묘를 충남 청양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석실(石室) 벽면에서 청룡(靑龍)ㆍ백호(白虎)ㆍ현무(玄武)ㆍ주작(朱雀)으로 구성되는 사신도(四神圖)를 비롯한 벽화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시대 상장의례(喪葬儀禮) 전문가인 국립고궁박물관 정종수 관장은 "시간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런 벽화묘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노회신이 사망한 뒤 조선사회에서 석실묘가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해 16세기에는 회격묘(灰隔墓)라는 새로운 묘제(墓制)에 밀려 종적을 감췄으며 그에 따라 무덤 벽화 또한 그릴 수 없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회신 묘는 석실묘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종말기에 축조한 무덤이 되는 셈이다.

석실분이란 글자 그대로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을 돌로 쌓은 무덤 양식을 말한다. 고려시대 고분 축조 판세를 완전히 장악하고, 조선 초기까지 유행한 이런 석실분에서 돌은 대체로 크고 납작하게 잘 다듬은 판돌을 이용한다.

회격묘는 지하로 묘광(墓壙.무덤 구덩이)을 파고 목관(木棺)을 안치한 다음, 느릅나무 껍질(柳皮)을 삶아 달인 물로 석회(石灰)와 황토(黃土), 세사(細沙.고운 모래)를 3:1:1 비율로 섞은 삼물(三物)로 관(棺)과 곽(槨.덧널) 주위를 다져 쌓고 봉토를 한 무덤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회격묘는 회곽분(灰槨墳)이라고도 하고 회곽묘(灰槨墓)라고도 부른다. 이런 회격묘에는 당연히 사신도와 같은 벽화를 그릴 수가 없다.

 
- 화강암제 대형 판석을 이용한 석실 내부 벽면과 천장에 먹과 붉은색 안료 등을 이용해 그린 벽화는 사신도(四神圖)와 인물도(人物圖), 성좌도(星座圖)가 확인된다. 사진은 북측 석실 서 단벽 인물상 세부.
정 관장은 이런 점을 들어 "우리나라 상장의례에서 고분벽화가 사라진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회격묘의 등장과 유행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유력한 조선왕릉 중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데는 단 한 곳도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왕비릉이 도대체 어떤 구조이며, 어떤 부장품을 넣었는지 적어도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곳은 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조선왕릉 중 적어도 한두 곳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설혹 조사가 이뤄진다 해도 "5대 문종 이전 왕릉을 발굴하지 않고서는 볼만한 건 없을 것"이라고 정 관장은 예상한다.

왜냐하면 세조 이후 조선의 왕실 혹은 사대부 무덤 양식이 석실묘에서 회격묘로 바뀐 것이 단순히 겉모양의 변화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부장품의 질과 양 또한 모두 눈에 띄게 박장(薄葬.간소한 장례)으로 변하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 왕릉을 석실묘로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회격묘로 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석실묘를 주장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명기(明器)나 명완(明玩) 같은 기물(부장품)을 (무덤에) 간직하기가 어렵다"는 반대 이유를 내세운다.

석실묘를 조성할 때는 적어도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무덤에는 반드시 사신도와 별자리 그림을 그려 넣는 규정이 조선 초기에는 있었다. 이에 따른다면 왕릉으로는 처음으로 회격묘로 축조한 세조 이전 무덤은 단 한 군데도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모두가 석실묘이며 그 벽면과 천장에는 각종 벽화가 발견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왜 무덤은 15세기를 고비로 석실묘에서 회격묘로 바뀌게 되었을까? 그것은 주자성리학의 보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화강암제 대형 판석을 이용한 석실 내부 벽면과 천장에 먹과 붉은색 안료 등을 이용해 그린 벽화는 사신도(四神圖)와 인물도(人物圖), 성좌도(星座圖)가 확인된다. 사진은 남측 석실 북쪽 장벽에 그린 백호와 그 세부.
고려말 안향이 도입한 주자학은 신흥왕조 조선을 건국한 주체들의 주축 사상으로 자리잡는다. 주자성리학은 단순히 이념뿐만 아니라 제도 자체에서도 새 바람을 몰고 왔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이 주자학의 제도를 집대성한 의례서로 간주됐다.

중국 본토에서는 주자가례가 주희의 저서가 아니라는 주장이 대세인 까닭에 그다지 실생활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조선에서는 그것이 주희의 직접 육성이 담긴 "경전"으로 간주돼 맹위를 떨쳤다.

이 주자가례에는 사람이 죽으면 무덤은 회격(灰隔)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에 주목한 조선초기의 성리학자들은 줄기차게 석실묘를 대체해 다른 어떤 곳보다 왕릉부터 솔선수범해 회격묘로 만들어야 한다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전통(석실묘)과 신문화 운동(회격묘) 사이에 일어난 충돌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다. 태종 8년, 태상왕인 태조 이성계가 죽자, 당시 집권층에서는 석실묘-회격묘의 일대 논쟁이 일어난다. 결론을 내릴 수 없던 태종 이방원은 할 수 없이 당시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종묘로 가서 점을 쳐서 어느 쪽이 좋은지를 알아보라는 명령을 내린다. 양녕이 어떤 방식으로 조상들의 뜻을 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론은 석실묘로 났다.

이런 과정들을 거친 뒤 회격묘가 대세를 점하게 되자, 그에 따른 편리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가 석실묘에 비해 회격묘가 돈과 노동력이 훨씬 적게 든다는 것이었다. 물론 주자성리학의 세계를 무덤으로 구현한다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뉴스관리자 기자 info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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