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바닷가 생전장례식 무슨 일이 있었나?

  • 등록 2025.05.26 15: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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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너, 내 연극 보러 언제 올래?"

 

배우 박정자(83)의 생전장례식이 강릉 순포해변에서 펼쳐졌다.
지난 5월 25일 오후, 배우 유준상(56)이 연출한 다섯 번째 장편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의 마지막 장면 촬영이 진행되었는데, 그 영화 속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80대 배우 '그녀'의 장례식이었다.

 

박정자는 이 촬영을 위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냈다. 영화 속 조문객으로 보조출연자 대신 자신의 실제 지인 150여 명을 초청한 것이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배우 강부자, 양희경, 소리꾼 장사익, 뮤지컬 배우 김호영 등 한국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기꺼이 강릉으로 달려왔다.

 

 

박정자는 이 촬영을 자신의 '생전 장례식'이자 앞으로 있을 진짜 장례식의 '리허설'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초청된 지인들에게 '장례 축제'를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을 담아 '박정자의 마지막 커튼콜'이라는 특별한 부고장을 보냈다.

 

부고장에는 "나의 장례식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장례식은 엄숙해야 한다고 누가 정했을까요. 오늘만큼은 다릅니다. 당신은 우는 대신 웃어야 합니다. 꽃은 필요 없습니다.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오래된 이야기와 가벼운 농담을, 우리가 함께 웃었던 순간을 안고 오세요"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정자의 당부대로 이날 촬영 현장에는 슬픔 대신 웃음과 환호, 박수가 가득했다. 박정자는 직접 메가폰을 잡고 "즐겁고, 신나게 해주세요. 슬픈 장면이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흥겹게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지인들은 북과 꽹과리, 장구 장단에 맞춰 웃으며 행진했고, 마치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 듯한 모습에 구경꾼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해변에 놓인 자그마한 꽃상여를 보고는 의아해하는 반응도 보였다.

 

 

참여자들은 소나무 숲에서 시작해 해변까지 내려오며 '햄릿', '오이디푸스',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 박정자의 대표작 제목이 쓰인 작은 깃발들을 들었다.

 

소프라노 임선혜가 부른 영화의 OST '환한 웃음으로'가 스피커를 타고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그냥 나 편히 보낸다 생각하오

이 노래 한자락 들려주고 떠나오

그대여 그냥 웃음만 환한 웃음으로…”

 

꽃무늬 원피스에 빨간 구두를 신은 박정자는 작은 종이 상여를 품에 안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웃으라는 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린 이들도 있었다. 바닷가에서는 박정자를 중심으로 반원 형태를 이루고 깃발을 모래사장에 꽂은 뒤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촬영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인이 떨어지자 박정자는 지인들과 포옹을 나누며 감사를 표했다.

유준상 감독은 3년 전 죽음을 생각하며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 '환한 웃음으로'를 바탕으로 뮤직비디오를 만들려다 영화로 확장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박정자 선생님과 잘 어울릴 것 같아 출연을 부탁했다"고 말했다. 저예산 독립영화라 힘든 스케줄 속에서도 박정자는 내색 없이 촬영에 임했으며, 유 감독은 그런 박정자를 보며 감동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촬영을 마친 박정자는 "아무리 좋은 작품도 관객이 없으면 소용없다. 관객이 있기에 내가 에너지를 받는다"며 자신을 지지하는 팬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했다. 다만 감정이 북받친 듯 소감을 말하기를 잠시 미루기도 했다.

 

이번 '생전 장례식'에 참여한 문화계 인사들은 박정자가 가진 남다른 영향력과 존재감에 대해 존경을 표했다. 김동호 전 위원장은 자신을 박정자의 '1호 남자친구'로 소개하며 참신한 발상에 기꺼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소리꾼 장사익은 박정자의 삶 자체가 연극이며 이번 장례식이 그 연극의 마무리 같다고 표현했다. 배우 양희경은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 사실이 선생님이 가진 파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우 정경순은 누군가 죽어야 만날 사람들을 살아있을 때 불러 모은 박정자는 우리나라에 나오기 어려운, 유일무이한 아티스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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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딩플래너 김동원 기자 info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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