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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장애인’이란 이름의 거인들

2018년 올해의 장애인상 수상자 프로필

정부는 38회 장애인의 날(420)’을 맞아 올해의 장애인상(3), 국민훈·포장(7), 대통령 표창(5), 국무총리 표창(4) 수상자를 확정했다. 김병호, 김소영, 황해원 3인을 소개한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연결합니다

김병호(·53·시각1·삼성전자 사회공헌센터 과장)

 

31세 젊은 가장이 갑자기 앞이 안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시력을 잃게 되는 포도막염이란 질병이었다. 모니터 글자가 보이지 않을 무렵 휴직계를 내고 치료에 전념했지만, 16개월 후 완전히 실명했다. 2년의 휴직기간이 끝나고 퇴사 처리 된 바로 다음 달 그는 회사에 재입사하게 된다. 그의 제안으로 새로 생긴 부서였다. 삼성전자 사회공헌센터의 시각장애인정보화교육센터 과장 김병호 씨가 그 주인공이다.

 

좌절할 시간이 없었죠. 4개월간 한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합숙훈련코스에 참여해서 걷는 것은 물론 ··부터 한글을 점자로 다시 배워야 했어요. 당연하게 했던 일들을 걸음마 떼듯 다시 시작하는 셈이었죠.”

 

중도장애는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장애를 수용하는 과정부터가 재활의 시작일 터. 당시 5, 2살의 어린 두 자녀와 아내를 둔 가장이었기에 그는 누구보다 빨리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훈련에 임했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던 일도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게 됐다. 휴직 전까지 그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서 품질관리 업무를 5년간 맡았었다.

 

소리에 의존해서 컴퓨터 사용을 다시 익혔습니다. 그 때 생각했죠. ‘나만 이렇게 배울게 아니라, 회사에 제안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보화교육기관을 만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또 그 일은 나 같은 사람이 적격이겠다.’”

 

삼성 휴대폰 시각장애인 접근성 확대 이끈 주역

 

회사 사회공헌센터에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1997년 그의 복직과 함께 시작된 것이 삼성전자 시각장애인 컴퓨터 교실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정보화교육이 전무했던 90년대 말에 기업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사회공헌 아이템이었다. 김병호 씨는 복직한 데 안주하지 않고 크고 작은 사회공헌사업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오프라인으로 운영되던 시각장애인 컴퓨터교실은 현재 e-러닝 사이트 애니컴을 통해 한글, 액셀 등 기본 문서프로그램 과정부터 인터넷정보관리사 자격 대비까지 가능한 수준. 현재까지 애니컴을 통해 100여 명의 시각장애인이 인터넷정보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복지관 정보화교육 강사 쪽으로 새로운 진로를 열었다. 특히 UX(사용자경험) 디자인이 대두되며 다양한 사용자의 접근성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 그의 피드백은 회사 내에서 톡톡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비장애인 개발자들이 미처 파악 못한 부분들을 당사자 시각에서 테스트하고 개선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2014년 출시된 휴대폰 갤럭시어드밴스드코어는 김병호 씨가 직접 개발 자문과 사용자 테스트에 참여한 제품이다.

 

이 모델 이후 삼성 휴대폰 후속모델들의 시각장애인 접근성은 기존에 비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업무 외 시간에도 다른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일한다. 사내 봉사단(스마트앤젤)을 꾸려 복지관에 직원들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보화 교육 강사로 봉사할 수 있게 연계하고 있고, 오디오북을 녹음하는 봉사단 메아리도 운영 중이다. 이제 사물인터넷(IoT) 시대. 점점 고도화되는 세상에서 시각장애인들은 또 다른 벽을 만날지도 모른다. 김병호 씨는 거기서 자신의 역할을 또 찾는다. “이제 TV, 세탁기 등 생활가전에도 인공지능이 도입되고 음성조작이 가능해졌습니다. 제가 당사자들을 위한 강의를 만들고, 회사 내에서 당사자로서 피드백을 통해 접근성을 개선해간다면 오히려 시각장애인들에게 더 나은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 시각장애인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프로 커넥터(connector). 그의 활약이 기대된다.

 

 

휠체어 타고 방방곡곡 쓸모 있는 사람 되고 싶어요

김소영(·48·한국척수장애인협회 차장)

 

태극마크를 달고 평행봉을 누비던 열여섯 살 소녀가 훈련 중 추락했다. 경추를 다친 소녀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20여 일 앞둔 날, 사지가 마비되는 중증장애인이 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전국을 누빈다.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정책기획부 차장 김소영 씨의 이야기다. 체조선수로 사는 건 불가능해졌지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스포츠였다. 재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1995년 우리나라 최초로 중증장애인을 위한 스키캠프(Young Life 장애인스키캠프) 개최를 주도한 것이다.

 

외국의 전문 스키강사 초빙부터 기업스폰서까지 직접 구해 치러낸 행사였다. 특히 우리나라에 중증장애인도 탈 수 있는 좌식스키를 이때 처음 들여왔다. 평창동계패럴림픽 종목 중 하나였던 장애인 알파인스키 종목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계기다. 무엇보다 스키를 처음 경험한 장애인들이 그 경험을 터닝포인트 삼아 삶을 변화시킨 것을 목격한 게 김소영 씨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장애인에게는 언감생심의 영역이던 동계스포츠의 관문을 새로 연 이 국제 행사를 당시 스물 다섯의 척수장애인 여성이 이끌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 스키캠프를 계기로 1996년에는 애틀랜타 올림픽 때는 국민투표로 뽑힌 일반인 성화봉송주자로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와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2의 삶을 전하는 멘토

 

다친 후부터 공부에 뜻을 두기 시작한 김소영 씨는 2002년 미국 마스터스 대학(Master's College)으로 유학을 떠나 5년간의 노력 끝에 상담학 학사를 취득했다. 부족한 재정상황은 물론이고 타지 생활 하루하루가 도전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공부보다) 체조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며 소회는 담담하다. 유학 후에는 태릉선수촌에서 선수들에 대한 상담 자원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현재 이사를 맡고 있는 장미란재단의 장미란 선수와 인연은 그때 맺어진 것이다. 김소영 씨는 운동선수들의 은퇴 이후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저는 다른 인생으로 빨리 전환한 셈인데, 그래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은퇴 후 진로의 폭이 너무 좁다보니, 목표만 보고 달리다가 그게 없어졌을 때 느끼는 상실감이 크거든요. 전 후배들에게 운동에 목숨 걸지 말라고 말해요.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성적에 너무 치우치지 않는 것, 운동을 대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요.”김소영 씨는 우리나라 제1호 대한민국 체육유공자이기도 하다.

 

단 한명에게라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김소영 씨가 늘 마음의 빚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척수장애아동들이다. 성인에 비해 지원도 적을뿐더러 긴 병원생활로 학업, 사회경험 등과도 거리가 멀어지면서 성장부터 어려움이 많다.

 

누군가의 삶이 변화되는 데 엄청난 지원이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때론 별거 아닌 도움이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더라고요. 보시다 시피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내가 받고 누린 것들을 나눠줘야 한다는 생각은 늘 있어요. 그게 시간이든 재능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나눠야할 책임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생각해요.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에 위축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생각에만 빠져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누군가에겐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 타인의 평가 말고 절대적인 자신의 존재 가치를 그대로 믿길 바라요. 또 그걸 받아들이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것도 바람이고요.”

 

 

대구시 최초의 청각장애인 공무원

황해원(·53·청각2·대구시 남구청 서기)

 

“4살 때 심한 열병으로 청각장애를 갖게 됐어요. 하지만 부모님과 형은 한 번도 저의 장애를 불행으로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끈끈한 가족애 속에서 자랐고,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죠.”

 

황해원 씨는 199612월 대구광역시 남구청에 장애인특별채용으로 입사한 최초의 케이스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종이라는 공무원직에 오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대구영화학교 졸업 후 숱하게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봤지만, 장애를 이유로 일자리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어렵게 취업한 곳에서는 소통이 어렵다며 얼마 못가 일을 그만둬야만 했다. 가장이었기에 공사현장도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장애인특별채용이라는 황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고, 황해원 씨는 그 기회의 주인공이 됐다.

 

첫 업무가 유흥업소, 위생단속 업무였어요. 특성상 대부분 야간근무에다 현장 단속 업무라 직접 뛰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본보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늘 있었죠.”

 

누구보다 치열하게 단속 현장에 뛰어들었지만 일할 때 필수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동료들, 민원인과의 소통은 그가 맞닥뜨린 큰 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몸으로 부딪혀 스스로 통하는근무환경을 만들어나갔다. 민원인들과는 필담을 통해서, 동료들에게는 직접 수어를 틈틈이 알려주면서 장애에 구애받지 않는 소통방식을 찾았다. 대구 남구청장 표창(20024), 최우수직원상(200912)은 장애와 무관하게 그의 열정적인 근무태도와 성과들을 인정받은 결과다. 동료들과의 남다른 호흡으로 불법퇴폐유흥지로 악명 높던 속칭 양지로가 현재 문화의 거리로 지정되는 쾌거를 남기기도 했다.

 

장애인 당사자로 구성된 봉사단 조직

 

황해원 씨는 2007년 대구 지역에 대구농아인봉사단을 발족했다. 어느 날 문득 장애는 있지만 활동에 전혀 문제가 없는 자신이 지금껏 받기만 했다는 것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날로 바로 봉사단을 조직한 그는 장애인거주시설, 노인요양시설, 지역사회 봉사활동 등 다른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10년 넘게 다양한 봉사활동을 이끌어왔다.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그의 행보에 대구의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뜻을 함께 했다. 1992년부터 27년간 활동해오고 있는 대구농아인협회 회원들의 협조도 컸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안정적인 곳에서 일하길 바라는 이는 똑같이 많을 것이다. 황해원 씨는 그래서 늘 전국의 청각장애인들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일한다. 그의 목표는 누구보다 모범적인 공무원으로서 정년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아직도 사회에는 청각장애인들이 일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좋은 예가 되어야, 저처럼 좋은 환경에서 일하는 청각장애인들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요?” 오늘도 황해원 씨가 대구 골목 곳곳을 누구보다 열심히 누비는 이유다.    [출처 : 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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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만큼 중요한 죽음준비 -김영심 웰다잉전문강사 임신 10달동안 태명에서부터 음식, 음악, 독서, 태담, 동화, 영어와 수학으로 학습태교까지 하고 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태아교육을 하고 있다. 탄생만큼 중요한 죽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보건소나 노인대학 강의시 죽음준비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죽음준비 다 해놓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 윤달이 있어서 수의를 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찍었다고 하신다. 결국 수의와 영정사진만이 죽음준비를 대신하고 있다. 죽음준비 강의 후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웠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네요.’ ‘사는동안 잘살고 죽음도 잘 받아 들여야겠어요.’ ‘확 깨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집에 가서 자식들하고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런 강의 처음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장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며 못을 박으며 ‘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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